설 연휴가 끝났습니다. 누군가는 아쉬워하고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일상에 다시 복귀하는 것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더구나 명절 동안 가족들 사이에서 감정이 상할 만한 일을 겪었다면 직장에서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고생하고 집에서는 여전히 험악한 분위기를 견뎌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매년 두 번씩 명절을 지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전쟁을 치릅니다. 아직 미혼인 사람들은 “이제 올해에는 결혼해야지?”라는 말을 듣기가 무척 고역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이런 잔소리를 끝내겠다는 희망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사람들이 시댁에서, 처가에서 겪는 갈등과 스트레스는 명절이 끝난 후에도 종종 부부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져 오랜 후유증을 남기기도 합니다.
시간이 흘러 괴로운 마음들이 가라앉고 회복될 수 있다면, 더 길게는 결혼 생활의 연륜이 쌓이면서 배우자와 가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명절과 같은 상황들에 익숙해진다면 정말 다행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복되는 갈등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심각한 마음의 병을 얻거나 그들의 관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곤 합니다.
■ 설 연휴에 다시금 반복된 ‘바꿀 수 없는 부부 갈등’
이번 설 연휴 기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다시 한 번 경험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는 부부나 그 가족들 중 누구 한 사람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누구나 알듯이 우리 사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너무도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각 가정의 구조는 여느 서구 사회 못지 않게 핵가족화 되었지만, 개개인의 생각은 이러한 변화를 따라가기에 벅찼던 탓에 결국 크나 큰 세대간의 격차가 남게 되었습니다.
대개 갈등이 생기면 우리는 갈등의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갈등은 그 원인들을 아무리 자세하게 조사하고 이해하더라도 바꿀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되돌릴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부모의 생각을 바꾸기는커녕 이미 현대 사회에서 성장해 온 우리 자신의 생각도 바꾸지 못합니다. 세대 간의 갈등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마음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예방하는 방법 또한 갖고 있지 못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부부가 함께 고스란히 겪어나가야 할 현실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바꿀 수는 없기에 우리는 마음으로나마 이러한 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배제한 채로 이러한 갈등의 원인을 배우자의 탓으로 돌립니다. 시댁 혹은 처가 식구들이 이상한 사람들이어서, 그 사이에서 남편과 아내가 제대로 중재하지 못해서, 또는 이 모든 상황들을 내 배우자가 넉넉하게 이해해주고 묵묵히 자기 역할을 감당해주지 못해서 명절이 지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는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모두 맞는 말이고 우리가 처한 현실이며 나와 내 배우자의 한계입니다.
■ 배우자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갈등 해소의 출발점
하지만 이것이 과연 내 아내 혹은 내 남편이 바뀌면 다 해결될 문제일까요? 만약 시댁이나 처가가 없으면 더 이상 우리 부부에게는 싸울 이유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부가 각자의 책임을 인정하고, 이러한 갈등을 공동의 과제로 인식하여 한 팀으로서 명절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부부가 한 팀이 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부로서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해야할까요? 각자가 처한 상황이 모두 달라서 세세한 부분들은 제각각이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 공통된 부분에 “내 자신의 감정과 배우자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배우자로부터 내 존재가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남편으로서 또는 아내로서 합당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내가 배우자로부터 인정 받기 원하는 것만큼 나의 배우자도 나에게 인정 받기 원합니다. 자신이 나에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기를, 내가 자신을 남편 혹은 아내로 삼은 것을 기쁘고 행복하게 여기기를 내 배우자는 열렬히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나 또한 배우자에게 같은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감정, 나의 바람을 바탕으로 우리는 상대의 감정과 바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서로의 감정을 인정하고 공동 운명체로서 신뢰해야…
업무와 일상에 바쁘더라도 부디 시간을 내어 남편 혹은 아내에게 명절 기간 동안 쏟아내야 했던 수많은 정신적, 육체적 수고들, 나의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들을 말로 표현해줄 것을 요청하고, 이를 주의 깊게 들으며 그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이 모든 경험들로 인해 배우자가 느껴야 했던 자괴감과 분노가 진정으로 당연한 감정임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설사 배우자가 말하는 상황의 사실 관계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더라도, 상대가 경험하고 있는 감정은 그 자체로 진실된 것이며 지극히 정당한 것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내가 이러한 감정들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 나의 남편, 나의 아내는 자신의 존재가 나에 의해서 인정받고 수용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해 받고 인정받은 배우자는 나 역시 자신과 동일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마음을 열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윽고 부부는 삶의 물줄기에서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공동 운명체로 서로를 인식하고 앞으로 마주할 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것임을 깊이 신뢰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뢰는 한 번의 경험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반복해서 다가오는 명절은 힘들고 부담스럽지만 부부간의 신뢰를 확인하고 단단하게 다져나가는 연속된 과정이 됩니다. 신뢰가 깊어질수록 부부는 오직 안정된 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국 같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서로의 존재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이 기쁨을 밑거름 삼아 우리는 부부로서, 그리고 각자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더욱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 연구소 김성재 교수
※기사 출처: 강북삼성병원 블로그